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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영화 이야기

by 빠선생 2021. 11. 16.

 


어렸을 적,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때 나는 유별나게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가 좋다고 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단지 시간 때우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나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져가는 것을 보는게 너무 싫었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영화 감상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나는 영화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아하는 배우였다. 가족들과 영화관에 가서 또 지루하게 영화를 보다가 좋아하게 된 그 배우. 그 배우는 지금은 인지도가 생겼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상업영화에서는 조연이나 단역을 위주로 맡던 배우고, 주로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 배우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단편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길어도 한시간이 넘지 않는 영화들이다 보니 내가 여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단번에 없애주었다. 너무 짧고 심오해 이해하기 힘든 영화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의 리뷰를 보고 여러번 다시 보면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

결정적으로 나에게 '인생영화'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도 그 배우 덕분이었다. 그 배우가 출연했던 단편영화 중 거의 유일한 로맨스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영화 감독 지망생으로 나오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 라는 영화를 언급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자주인공이 열변을 토하며 여자주인공에게 꼭 보라고 권하는데, 왠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다음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는 장면도 나온다. 제목은 익히 들어본 영화였는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 누가 출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영화 보는 것을 귀찮게 여기던 나는 그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틀었다. 그 때는 매일 학원을 다니던 때라 시간이 모자라 영화를 한 번에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학원 안 가는 시간에만 잠깐씩 봤는데 그래도 너무 좋았다. 요즘 영화처럼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자꾸만 다음 장면이 궁금해져서 학원에서도 빨리 집에 가서 마저 봐야지라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 날 밤, 그 영화를 모두 본 다음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영화를 보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 때부터 나의 인생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같은 감독의 작품인 <봄날은 간다>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90년대 후반 멜로 영화를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불한당

이렇게 영화에 입문하게 된 나는 여전히 영화를 닥치는대로 보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무조건 보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아직도 영화를 보는 것은 큰 시간 소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들여서라도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아무리 미루더라도 언젠가는 본다. 그렇게 해서 나의 또다른 인생영화가 된 작품이 있다. 바로 <불한당>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 장르이다. 그래서 어디 가서 나의 인생영화를 사람들에게 나열하면 조금 놀라워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봄날은 간다>...그리고 <불한당>. 어딘가 안 어울리는 조합이니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물들 간의 미묘한 감정선이 중요한 영화이며, 끝나고 나서 여운이 엄청난 영화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정하는 기준은 딱 하나인데, '영화를 다 본뒤 바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가'이다. 영화가 끝난 뒤 바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거나 뒤늦게 다음날부터 여운에 빠져 일상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나는 후자를 내 인생영화라고 생각한다. <불한당>은 이 점에서 나의 인생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사실 처음 본 날은 기대보다는 못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바로 잠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부터 자꾸 주인공들이 생각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참 이상한 힘이 있는 영화였다. 그 여운 때문에 영화를 7번이나 봤지만 아직도 다시보기가 두려울 정도다. <불한당>은 관객수가 100만도 못미친 영화이지만,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힘든 팬덤을 형성한 영화이다. 대중들은 잘 모르는 영화라 할지라도 불한당원들에게는 최고의 영화이다. 소수라 할 지라도 나와 함께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불한당원들이 내놓는 다양한 해석들을 보며 점점 더 <불한당>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간 연예인을 좋아한 적은 많았어도 영화를 이렇게 좋아해본 적은 없었는데, 굉장히 값진 경험을 한 것 같다.


 

화양연화

나의 다음 인생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이다. 올 초, 왓챠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리마스터링 해서 올려주었다. 왓챠 이용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든 뽕을 뽑았어야 했는데, 마침 그 유명한 작품들이 들어왔다고 하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가장 먼저 본 작품은 <중경삼림>이었다. 가장 많이 들어본 작품이기도 했고.  유튜브 리뷰를 보면서 꼭 봐야지 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중경삼림>도 처음에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뒷북 전문인 나는 뒤늦게 여운에 빠져 하루종일 'California Dreaming'만 듣게 되었다. 왜 그토록 사람들이 <중경삼림>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으로 본 영화는 <해피투게더>였다. 장국영과 양조위가 커플로 나온다는 얘기에 궁금해서 보게 된 영화였다. 이 영화도 볼 때는 조금 지루하기도 했고 그닥 여운이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또 뒷북 발동한 나는 며칠 뒤 하루종일 ost를 들으며 두 주인공을 생각했다. 현실적이면서도 안타까운 두 사람의 사랑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다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양연화>였다. <화양연화>는 뒷북만 쳐대던 나도 보는 내내 감탄하게 만든 영화였다. 화려한 미장셴과 너무도 아름다운 두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흔할 수 있는 불륜에 관한 내용인데, 그것을 뻔하지 않게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 너무 좋았다. 흔한 스킨십 장면 하나 없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아슬아슬했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아름다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불한당>,<화양연화>.. 너무나도 다른 세영화가 나의 인생영화이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이였던 내가 이런저런 영화에 도전해보고, 영화 동아리까지 들어가게 된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앞으로 이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야기 해보고 싶은 영화들, 심심풀이로 봤던 넷플릭스 컨텐츠 등에 대해 이야기 해볼 예정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지만 마음 먹은 이상 열심히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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